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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선봉장으로서 이름이 알려진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 : 가토 기요마사)과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이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가는 길이 틀려서 서로 갈등이 심할데로 심한 사이였습니다 가치관이 틀려 차이가 많지만 반면 공통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그들의 일생을 한번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 봅니다
참고자료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징비록, 네이버사전, 나무위키 등
1. 출신
가등청정은 어릴적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으며 전국시대 이후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이 됨
소서행장은 상인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풍요롭게 살았고 풍신수길에 합류함 (가등청정보다는 합류가 늦음)
2. 종교
가등청정은 불교 신자 이며 사명당 유정과 회담했던 것이 유명합니다 이때 유정이 가등청정의 머리가 조선의 보물이다 라고 했죠
소서행장은 포르투갈 에서 조총이 유입되면서 같이 온 천주교를 믿었습니다 일본 역사 첫 기리시탄 출신 입니다
가등청정이 천주교 신자 들을 추방하거나 살해하기 시작하였고 살아남은 천주교 신자들은 소서행장의 영지로 이동하게 됩니다
3. 영지 규모
이 둘은 서로 이웃이었으며 영지 규모는 서로 비슷했다고 함 자료 마다 미세하게 차이가 있음
사실 위치가 가까웠기 때문에 이 둘은 사이가 좋을수가 없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종교 문제로 인해서 이들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4. 전쟁에 대한 인식
가등청정은 풍신수길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주군의 명은 무조건 따르는 인물이지만 소서행장은 상인 출신이라 좀 달랐습니다 옆나라 조선의 장수들과 나름 교류가 있었을 정도로 무역을 하면서 지냈는데 전쟁이 나면 대마도의 상황이 아주 안좋아지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상인이라는 입지에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습니다 풍신수길의 욕심에 대해 무모한 전쟁이라 생각하고 반대를 했으나 그의 욕심을 꺾는데는 역부족이었고 그는 사위인 종의지(소 요시토시)와 현소(겐소)를 통해 조선에 지속적인 경고를 했지만 결국 조선은 믿지 않아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소서행장은 별 수 없이 선봉장을 자처 하며 최대한 선조를 빨리 사로 잡고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 먹습니다
5. 임진왜란 초기
소서행장은 부산포를 시작으로 명장 신립까지 쓰러뜨리면서 거침없이 한양으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이미 빤스런을 하였고 (임금의 몽진에 대한 평가는 각자 엇갈립니다) 소서행장은 선조를 잡기 위해 계속 올라가며 평양까지 일직선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가등청정은 소서행장 보다는 다소 늦게 조선에 도착하여 최대한 안전한 루트를 골라 이동하여 거의 무혈입성을 하면서 진격 합니다
이 사이에 문서를 위조하여 자신의 공적을 과장하였으나 석전삼성(이시다 미츠나리)이 이를 알려 지적받자 석전삼성 과도 갈등을 빚습니다
함흥 라인으로 올라가 순왜 중 한명인 국경인에 의해 임화군, 순화군을 사로 잡아 대접하게 됩니다
6. 그들이 맞는 1차 위기
평양까지 올라갔던 소서행장은 평양성에서 농성하면서 변수를 맞게 됩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렸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큰 일이 일어나는데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연전연승을 하여 바닷길이 막히고 여러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 게릴라전을 펼치자 보급을 받지 못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명의 구원군이 도착하여 평양성을 내주고 남쪽으로 후퇴합니다 (조승훈의 병력은 별 피해없이 막았으나 이여송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구석에서 농성 펼치다가 이여송이 퇴로를 열어줄때 도망칩니다) 가등청정 또한 함흥일대에 있다가 여진족을 건드려봤다가 위험한 상황이 나오기 전에 뒤로 물리고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에 의해 퇴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시 만나서는 서로 패배를 비웃고 비아냥 거리면서 갈등은 깊어집니다
7. 강화회담 기간
가등청정은 이 회담 기간 동안 중에 임화군, 순화군을 다시 보내주고 소서행장은 심유경과 함께 강화회담을 진행하였습니다 도중에 풍신수길은 진주성 공격을 명령하였고 진주성 2차전투가 임박할때 소서행장은 강화회담중인 이 상황에서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진주성에 주둔한 조선군에 전쟁소식을 알리지만 믿지 않았고 끝내 진주성은 함락당합니다 명조정과 풍신수길이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하며 강화가 깨질 위기에 처하자 소서행장과 심유경은 요단강 건너갈 희대의 사기극을 펼치며 회담의 종지부를 찍으려 하지만 이 사기극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소서행장은 이때 죽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게 됩니다 (심유경은 처형당함)
8. 정유재란
정유재란때는 가등청정이 선봉장이 되어 먼저 조선으로 건너갔고 소서행장은 요시라를 통해 서신을 보냅니다 가등청정과 사이가 안좋으니 이순신장군의 수군을 보내서 제거해줬으면 한다 내용의 서신을 보냈는데 이때 당시 가등청정은 이미 바다를 건넜고 이순신장군은 부산포 일대를 출전하여 가등청정을 놓친 것 외에는 나름 성과를 얻어가고 철수 했으나 원균의 로비+선조의 의심병이 합쳐져서 결국 그는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 당하게 됩니다 소서행장이 진짜 의도 한거였다면 그는 희대의 천재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서신 한장에서 이런 일이 펼쳐질 줄 몰랐을 가능성이 높기에 그는 희대의 불운을 지닌 인물 이었을 겁니다 남원성을 공격하고 난 뒤에 가등청정은 울산, 소서행장은 순천에 주둔 합니다
9. 그들이 맞는 2차 위기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이 전체적으로 불리해졌고 조선, 명 연합군은 승기를 잡기 시작합니다 울산에 주둔하던 가등청정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는 죽을 위기를 겪게 됩니다 철옹성이긴 해서 잘 버텼으나 식수를 끊어버려 우물이 말라버렸고 장기적인 농성전에 식량, 식수 모두 떨어져 말을 잡아 피를 마시고 (심지어 인육까지 먹어서 버텼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어렵사리 구원을 요청하여 가등청정은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남았고 풍신수길이 죽자 조선에서 물러납니다
소서행장 또한 풍신수길의 죽음 소식을 듣고 퇴각하려고 하였으나 육지에는 명나라 유정(사명당과 동명이인) 제독이 머물러 있었고
바다에는 이순신장군의 수군과 진린의 수군이 주둔하여 꼼짝없이 갇히게 됩니다 명나라 측에는 뇌물과 수급을 챙겨주어 어느정도 길이 열리는가 싶었지만 이순신장군 께서 길을 열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소서행장 또한 가까스로 지원을 요청하였고 노량해전이 일어난 시간을 틈타 조선을 빠져나가면서 임진왜란은 끝나게 됩니다
10. 왜란 이후의 그들의 운명
소서행장은 석전삼성이 이끄는 서군에 합류하고 가등청정은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합류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소서행장은 가등청정과의 접전에서 끝내 패했고 기리시탄 이라는 이유로 할복을 거부했고 각종 치욕을 당하면서 사형이 집행되면서 소서행장은 먼저 인생길 퇴장하면서 거의 멸문을 하게 됩니다 가등청정은 그 이후 울산성 전투의 일을 교훈삼아 구마모토 성을 건축하였고 정치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는데... 이후에 일족은 영지를 몰수 당하게 됩니다 그나마 가문이 완전히 멸문하진 않았지만요
이렇게 해서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의 인생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11. 마치며...
이 둘은 다른 집안출신, 종교, 전쟁에 대한 입장 등 서로 다른 점이 많았고 결국 이 둘은 전쟁 중에도 끝없이 갈등하고 싸웠고 그들만의 각자 전쟁중에 죽을 위기를 겪으면서도 끝내 다른 가치관을 가졌기에 갈등을 매듭짓지 못해서 사생결단이 날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소서행장과 가등청정 간의 뜻밖의 이야기가 있는데 소서행장이 위기에 처했을때 가등청정이 그를 구원하러 왔는데 (혹은 반대로 가등청정을 구원하러 온 소서행장) 소서행장이 그동안의 갈등을 잊고 친하게 지내고 싶다 라고 먼저 이야기 했지만 가등청정은 너와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친해질 수 없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만약 이 둘이 여기서 화해를 했다면 그들의 후반부 인생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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